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이완 독립운동 (문단 편집) == 역사 == 많은 대만 [[본성인]]들은 17~18세기에 [[푸젠성]] 지역에서 이주해 온 [[한족]]의 후손들로서 푸젠성과 긴밀한 연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만 본성인들도 1911년 [[신해혁명]]에 호응하는 봉기가 발생했을 정도로 [[대만일치시기]] 초반에는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상당히 존재했다고 한다. 다만 [[일본 제국]]의 식민지 중에서 1945년 패전 때까지 단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적자 재정[* 일본 정부에서 교부금을 지원받아서 재정을 운영했다는 이야기다.]이었던 [[조선총독부]]와 달리 차·쌀·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제당산업의 발달로 일찍부터 흑자 재정을 달성한 [[대만총독부]]는 상대적으로 유연하고 유화적인 통치를 한 이유로[* 대만은 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세워본 적이 거의 없고 계속해서 외래 세력의 통치를 받아 왔기 때문에 결국 같은 외래 세력인 일본의 통치에도 쉽게 적응했으므로 [[일제강점기|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항이 덜하기도 했고, 대만은 일본이 얻은 첫 식민지(대만이 1895년, [[관동주]]와 [[일본령 가라후토|남사할린]]이 1905년, [[일제강점기|조선]]이 1910년, [[남양 군도]]가 1921년)인 관계로 다른 유럽 열강에게 '우리 일본도 식민지 지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범 케이스였기 때문에 식민지 치고는 상당히 대우를 잘 해줬다. 일본의 대만 통치는 가장 성공적인 [[제국주의]] 식민지배 중 하나로 평가된다.], [[1920년대]] 이후 일본에 상당히 동화된 대만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일본인]]으로 규정하고 종전 직후 일본의 철수를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즉, 50년의 일제 통치기간은 대만 [[본성인]]들에게 [[중국인]]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심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게다가 대만 [[본성인]] 엘리트들은 기본적으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인해 대만이 [[청나라]]로부터 버림받은 지역이라는 고아의식을 갖고 있었고, [[대만일치시기]]에 [[중화민국]]을 조국이라 생각했던 인사들조차 [[중국 본토]]에 가서 활동하는 동안 중국인들로부터 '일제 앞잡이'나 '미개한 토인' 등으로 취급 받으면서 대만과 중국을 구별하는 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직후 대만을 방문한 중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당시 대만인들이 '''우리 대만'''과 대비되는 '''너희 중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 대만인'''과 구별되는 '''너희 중국인''' 용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복잡한 사정은 제쳐두고서라도, 일본인들 역시 대만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고 2등 국민 취급하는 것은 역시 다른 식민지 지역과 다를 바 없었으며 전쟁 수행으로 인해 타이완 민중의 삶은 고달파지기 시작했다. [[대만총독부]]가 해체 직전에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단체를 후원하기도 했지만 세가 매우 미약했다. 그렇기에 1943년 발표된 [[카이로 선언]]에 따라 종전 직후 대만이 [[중화민국]]에 반환되고 [[국민혁명군]](이후 [[대만군|중화민국 국군]])이 [[타이완 섬]]에 상륙했을 때 대다수의 대만인들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한족이 다수인 중화민국이 자신들을 2등 국민이 아닌 대륙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타이완 섬]]을 접수한 [[중화민국]] 행정 당국은 일제 통치를 겪은 대만 [[본성인]]들을 여전히 '일제 앞잡이', '한간'으로 몰아[* 사실 중화민국뿐만 아니라 영토를 탈환한 나라에서는 탈환한 지역 주민을 과거 점령국의 앞잡이로 모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6.25 전쟁 때 남북한도 그랬다.] 수탈하고 천대했으며 가장 기본적으로 언어조차 통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해 봉기한 대만 [[본성인]]들은 [[대만어]]와 [[일본어]]를 쓰면서 중국 [[외성인]]들을 솎아냈고, [[중화민국]] 정부가 이런 대만 [[본성인]]들을 대거 학살한 [[2.28 사건]]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공식적으로 최소 28,000명에서 40,000명에 달하는 [[본성인]]이[* 외성인도 600~700명 사망했다.] 이때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으며 그 후 [[국부천대|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도망쳐 온 뒤]]에도 [[외성인]]이 사회 주도세력으로 활동하여[* 관리, 교사 임용 할당을 [[국부천대]] 이전의 비율인 전 지역의 인구 비율에 따라 할당해놓았는데 1980년대 이전까지 국민당에게 타이완은 본토로 돌아가기 위한 전진기지에 불과했고 중국 전체를 영토로 인식했기 때문에 임시조치로 사용한 것이었겠지만 본성인에게는 또 하나의 차별대우라는 각인을 주었고 실제로 그렇게 기능했다. 이 탓에 1980년대 이전까지는 외성인, 본성인 갈등이 굉장히 심각했었다. 지금은 다소 완화되었지만 과거에는 결혼을 반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화조차 나누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당시 외국 기독교 선교단체의 통계에 따르면 외성인은 85%, 본성인은 97%가 가장 친한 존재가 외, 본성인이라고 답할 정도였다.] 민주화 이전까지 본성인의 힘이 위축되었다. 국부천대를 전후해서 국민당을 따라 들어온 한줌도 안되는 외성인들이 정치권과 군부, 경제, 교육,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인구의 절대 다수를 자치하는 본성인들은 쩌리 신세로 밀려나 버린 것이다. 이에 '[[대만인]]은 대만인이지, 중국인이 아니다'라는 대만 고유의 민족의식이 싹트게 되어 대만 독립운동이 급성장하게 된다. 그러니까, 대만 섬은 중화민국 정부가 대륙에 있던 시절에는 [[대만일치시기|일본의 지배]]를 받아 중화민국과 관련이 없었고[*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된 것이 1912년인데,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이 일본에 할양된 것이 '''그보다 17년 앞선''' 1895년이다.], 중화민국으로 반환된 후에는 [[2.28 사건]]을 겪고 [[중국국민당|국민당]] 정권과 [[외성인]]에게 차별받는 등 중화민국과 친할래야 친할 수가 없었는데, '''하필이면 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져서 도망쳐 온 섬이 자기네들을 그렇게 싫어하는 대만이었더라는 것이다.''' 즉 현재의 [[대만|중화민국]]은 그들이 이전까지 [[대만일치시기|지배하지도 않았었고]], [[2.28 사건|탄압하기까지 했던]] 지역으로 도망쳐 와 사실상 본토로 쓰게 된, 전세계적으로 통틀어 봐도 정말 독특한 정권인 셈이다. 대만 독립운동 역시 [[홍콩 독립운동]][* [[홍콩]] 반환 때도 대만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 베이징의 중앙정부가 최소 50년간 홍콩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하겠다는 [[일국양제]] 원칙을 내걸었기 때문에 홍콩인들은 대체로 환호했다. 당시 한국 [[문화방송]]이 홍콩인을 인터뷰한 뉴스를 보면, 홍콩이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기쁘다고 답한 바 있다. 반면 [[천안문 6.4 항쟁]] 등을 이유로 중국을 믿지 못해 다른 영연방 국가로 도피성 이민을 가거나 반환에 반대하는 여론이 존재하기도 했고, 지금은 약속과 다르게 중공 중앙정부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또한 본토와의 경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홍콩인이 본토인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생겼고, 비슷하게 홍콩의 독립을 주장하는 소수 세력이 존재한다. 심지어 영국으로 복귀하자거나 대만에 있는 중화민국 휘하에 들어갈 것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다.]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데, 대만에서도 [[대만일치시기|일본으로 복귀하자]]는 주장도 보인다. 대만의 중화민국 반환을 선언한 [[카이로 선언]]에 국제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이유로 대만의 중화민국 귀속을 부정하고 대만의 지위가 국제적으로 규정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긴 한데, 이들 중에서도 공식적으로 일본으로 복귀하자는 주장은 크지는 않다. 카이로 선언과 달리 국제법적 구속력이 확실하게 있는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이 대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확실히 포함되었고, 이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도 재확인했기 때문이다. 2020년 이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반중]] 정서와 이에 탄력을 받은 [[차이잉원]] 정권의 외교적 움직임으로 전 세계적으로 대만 문제에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다. [[2020 도쿄 올림픽]] 개막식에서 일본 NHK 진행자가 중화 타이베이가 아닌 타이완으로 소개했는데 양 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감안하더라도 기존에 상상할 수 없었던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다. 2021년 [[리투아니아]]에서는 중국의 반발에도 대만과 상호간 대표부 개설을 결정했는데 4년전만 해도 중국의 압박으로 [[나이지리아]]에 상주한 대만 대표부가 수도를 떠나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국제 정세에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일단 대만 독립운동 문제에 세계적인 관심이 증가했고 중국의 눈치를 덜 신경쓴다는 것이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대만 내부에서도 독립운동에 현실적인 회의감을 가지고 있던 세력들 또한 대만 독립의 형태든 중화민국의 승인이든 어떤 식으로 국제적 승인을 받을 가장 좋은 기회로 판단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